촉석루와 뒤벼리 친일자 음각 이름을 알려야 합니다
촉석루와 뒤벼리 친일자 음각 이름을 알려야 합니다
  • 진주시의회 5분자유발언
  • 승인 2020.12.1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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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문화위원회 박철홍의원
박철홍 의원(제공=진주시의회)
박철홍 의원(제공=진주시의회)

<5분자유발언 전문>

존경하는 진주시민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박철홍 의원입니다.

진주시 이,통장발 코로나19사태로 모두가 힘들지만 거리 두기 등 방역수칙을 잘 지키는 자랑스러운 진주시민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본 의원은 촉석루와 뒤벼리에 새겨진 친일인사의 이름과 촉석루 안에 있는 친일인사의 시혜비를 알릴 표지판을 세워 아픈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주제로 발언을 하고자 합니다.

1. 이 사진은 촉석루에서 의암으로 내려가면 오른쪽 벼랑에 이은용과 개명 후 이름인 이지용의 이름이 한자로 새겨진 모양입니다. 왕족으로 태어난 이지용은 고종의 5촌 조카이며 본명은 이은용으로 1899년 8월부터 1900년 6월까지 진주에서 경상남도 관찰사 겸 경상남도 재판소 판사로 재직하였으며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과 더불어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을사5적으로 유명합니다. 현재 촉석루 아래 절벽에는 이지용과 개명 후 이름인 이은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2. 촉석루 아래를 지나 남강이 동쪽으로 흘러가면 병풍을 두른 듯 깍아 지는 절벽이 아름다운 뒤벼리가 펼쳐집니다.

지금은 차량의 통행이 많고 낙석 방지막이 설치되어 있지만 뒤벼리는 진주 8경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풍광을 자랑합니다

그러한 탓에 뒤벼리 너른 바위에는 시대를 풍미했던 인사들의 이름이 다소 음각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구한말 경상남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탐관오리로 일제의 침략에 적극 가담했던 이재각(李載覺), 이재현(李載現), 성기운(成岐運)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선 이재현은 고종과는 8촌간의 왕족으로서 1901년 9월부터 1903년 7월까지 진주에서 경상남도 관찰사로 재직했고 특히, 의병 토벌과 탐관오리로서 원성이 높았던 이재현은 그가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인 1903년 2월 진주성 동장대(東將臺)의 석축을 헐어 자신의 생사당(生祠堂)을 짓는데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성기운 역시 1904년 4월부터 1905년 2월까지 경상남도 관찰사로 재직하였고 이후 1907년 10월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의 봉영위원을 맡았으며, 1909년 안중근의사가 사살한 이토히로부미의 추도식을 위한 제문담임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에는 병합의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의 작위와 함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이재각은 이재현의 동생입니다. 이재각은 경상남도 관찰사로 재직하지는 않았지만 친일반민족 행위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초대 적십자 총재를 지내는 등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특히, 1905년 3월 중국의 봉천 전투에서 승리하며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공로로 1905년 5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으며 한일병합 후에는 ‘후작’의 작위와 함께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3. 사진으로 보는 바와 같이 뒤벼리에 세워진 알림판은 낙석 방지 철조망 안에 방치되어 있으며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의원은 뒤벼리 강변 쪽 인도에 세워 많은 분들이 관심 가지고 읽을 수 있게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촉석루 벼랑에 새겨진 이지용, 이은용 글씨를 알릴 표지판을 세우자는 건의는 수차례 있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진주시에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강 건너편에 알림판과 망원경을 설치하여 쉽고 안전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대안을 제시합니다.

4. 이사진은 진주성 안 박물관 왼편에 있는 정표환의 시혜비 즉, 베풀어 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정표환이란 인물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비행기

‘진주호’ 헌납에 당시로는 5천 원을 헌납하였는데 당시 서울 집한채 값이 천 원이었으니 거금을 일제에 헌납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황군의 무을을 바라는’ 시국광고를 게재한 친일 인사입니다.

다음 사진 보여 주시죠..

여기는 진주성 안 경절사와 청계서원 앞에 있는 비석군입니다.

이중 친일인사 몇 명만 말씀드리면 정태석은 애국 비행기 진주호 헌납에 진주 최고액인 일만원 이상을 기부하였으며 국방성금 헌납과 ‘전승신년 시국광고 게재 등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상장을 하사받은 인물입니다.

정상진이란 인물은 ’황군 대승의 봄을 맞이하다‘ 황군의 무운을 바라는’ 등의 시국 광고를 게재하고 많은 국방성금을 내었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표창을 받은 대표적인 친일 인사입니다.

임진왜란 계사년 전투에 7만 민관군이 장렬히 순국한 진주성은 우리에게는 자랑이지만 한이 서린 곳입니다. 친일인사의 시혜비가 진주성 안에 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 치욕이지만 이를 알리고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역사의 교육 현장으로 알리자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해방 후 친일파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독립운동가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진주 명승지에 이름을 새긴 그들의 잘못된 행위와 친일인사의 시혜비가 진주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잊지 말자는 취지는 시민 모두가 공감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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